나와 사람들의 행선지는 대전이다. 그러나 우리가 가는 길은 고속도로가 아닌 한적한 국도. 아마도 어딘가를 들러서 대전을 향하는 모양이다. 첫 목적지인 이름을 알 수 없는 소도시 터미널에 도착했다. 지방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모든 것이 낡고 허름한 느낌이 드는 소도시의 시외 버스터미널. 사람들은 일을 보러 어디론가 갔다. 나는 버스터미널에 혼자 앉아 이곳저곳 풍경을 둘러보았다.
일행 중에 한 여자가 있었다. 내 옆에 앉은 그는 어딘지 모르게 낯이 익었고 내게 항상 웃는 눈으로 말을 건넸다. 난 그녀가 내 애인은 아니더라도 꽤나 친한 사이란 것을 알 수 있었다. 나는 내심 그녀가 내 곁에 오래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러곤 중간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사람들이 돌아왔다. 그들은 나를 부르더니 내게 대전까지 가는 표를 끊어오라고 했다. 흔쾌히 그러마하고 난 매표소 앞에 서서 주머니를 뒤져 보았다. 바지 뒷주머니, 겉옷 안주머니 바깥주머니 다 뒤졌지만 지갑이 없었다. 아, 이런. 또 지갑을 놓고 왔구나. 주머니에도 돈이 한 푼도 없었다. 난 왜 항상 돈이 없는 걸까?
일행은 다 나보다 나이가 많거나 내 친지들이었다. 난 그들에게 돈이 없다고 말하기엔 체면도 구기고 말하기도 어색한 상황이었다.
아, 저 쪽에 그녀가 보인다. 그녀라면 돈을 빌려줄 것이다. 난 그녀에게 다가가 자초지종을 말하곤 돈을 조금 융통해 달라고 했다. 일행은 저 녀석이 표는 안 끊고 뭘 하나 하는 눈빛으로 그녀와 나를 바라봤다. 그녀는 웃으며 알겠다고 하고선 ‘잠시만요’라고 하더니 저쪽으로 가버렸다.
아니 이 여자가 빌려달라는 돈은 안 주고 어딜 가는 거야. 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냥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저쪽에서 일행들이 담배를 피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아, 이 사람아 뭐해. 얼른 표 끊어와. 늦었어.”
일행 중 한 명이 내게 소리쳤다.
“예, 금방 살게요.”
그녀가 돌아왔다. 그녀는 내 앞에 서더니 포켓 경전 세 권을 내보이며 “하나 골라보세요”라고 하는 것이 아닌가. 난 적잖이 당황스러웠다. 이게 무슨 경우란 말인가. 내가 빌려달라고 한 건 얼마간의 돈인데 말이다. 내게 경전이나 읽으며 마음 수양이나 하란 말인가? 나는 당황하고 약간은 실망스런 얼굴로 내가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쭈뼛거리며 서 있었다. 그러자 그녀가 웃는 눈으로 “다 좋은 책이에요”라며 내 턱밑에 책을 들이댔다. 이 상황에선 난 뭐라고 말을 해야 하는 거지? 그녀는 답답하다는 듯한 표정으로 “아이 참”하며 책을 다시 거둬들이더니 그중에 한 권을 뽑아서 내게 다시 내밀었다.
“이걸로 하세요. 저는 이 구절이 맘에 들어요.”
그녀가 책 가운데 어딘가를 펼쳐 보이며 말했다. 이 여자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지? 그녀가 내미는 책으로 눈을 돌렸다. 책장을 본 순간 난 정말 깜짝 놀라고 말았다.
그 녀가 펼쳐준 책에는 차비로 쓰고 남을 만큼의 만 원짜리 몇 장이 가지런히 잘 떨어지는 테이프로 붙여져 있었다. 내 놀라는 표정 본 그녀는 웃으며 말했다. “이게 맘에 안들면 다른 책을 보셔도 되요”라며 다른 책의 책장을 펼쳐보였다. 거기에도 같은 식으로 만 원짜리가 붙어 있었다.
“이게 뭐…죠? 왜…?”
“보는 눈이 많잖아요. 직접 돈으로 주면 당신이 좀 곤란해 할 것 같았어요.”
그녀가 낸민 책을 난 꼬옥 받아 쥐었다. 그녀는 여전히 다정한 웃음을 띠고 내 눈을 바라보았다.
대전행 버스 옆자리, 그녀가 내 어깨에 머리를 기댄 채 잠들어 있다. 난 그녀에게 그녀가 내게 해준 만큼 배려하고 자상하게 생각해 줄 수 있을까 생각해 보았다. 아마도 못 하겠지… 하지만 그렇게 하려고 최선을 다 하겠다고 마음속에 다짐한다. 그녀의 반응이 어떨지 모르겠지만, 버스가 목적지에 도착하고 그녀와 헤어지기 전에 꼭 말 해야지.
“전 당신에겐 많은 것이 부족한 사람 입니다. 하지만 당신만 좋다면 오래도록 당신과 함께 있고 싶습니다.”
*****
2006년 12월 첫주 어느 날에 꾸었던 꿈이다. 이런 사람이 있으면 좋겠다는 내 무의식적 열망이 만들어낸 꿈이라도 좋았다. 비록 꿈이지만 다시 그 사람을 만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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