굿바이
굿` 바이 : Good&Bye
Good & Bye
8.9
글쓴이 평점
Good & Bye
지금 내 나이 보다 일곱 살 많았던 그가 죽었다.
어떤 이는 미인박명이라며 안타까워했고, 어떤 이는 죄 많은 놈이라 하기도 하였다.
내게는 그런 말들이 하나도 와 닿지 않았다. 나는 그의 죽음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다.
그는 시한부 삶을 살고 있었다. 의사는 6개월에서 1년 정도 시간이 있다고 했다.
시한부 낙인을 받은 후 4개월도 채 살지 못하고 그는 이승을 떠났다.
그의 죽음을 맞닥뜨렸을 때 나는 “시한부”라는 말의 충격도 제대로 못 추스르고 있었다.
나는 그가 죽은 후 두 번 그의 손을 잡아보았다.
처음 그의 손을 잡았을 때, 어린 시절부터 느꼈던 그만의 온기가 남아 있었다.(사람마다 지문이 다르듯 손의 온기도 다르다.)
그는 곤한 낮잠을 자는 것처럼 보였다.
내 손길을 느끼곤 금방이라도 눈을 떠 “더운데 오느라 고생했구나.” 할 것만 같았다.
처음 그의 손을 잡았을 때 나는 그의 죽음을 실감할 수도, 인정할 수도 없었다.
여전히 따뜻한 그의 손을 잡고 나는 “당신을 죽게 만든 세상에 복수하겠다!”는 말을 되풀이했다.
왜 그 많은 말 중에 나는 “복수”를 말했을까? 그때 내 입에서 나왔던 “복수”는 구체적인 대상이 없었다. 세상 모두가 미웠을 뿐이다.
지금 돌아보면 내가 사랑했던, 내 삶의 지표였던 그의 죽음에 대한 원망의 대상이 필요했던 거였다.
함께 있던 그의 아이들은 모두 눈물범벅인 채로 그 말을 따라 했다.
입관하기 전 애꾸눈 장의사는 “고인과 마지막 순간입니다. 인사를 나누세요.”라고 했다.
나는 마지막이자 두 번째로 그의 손을 잡았다. 손은 이미 서늘하게 식어 있었다. 차갑지는 않았으나, 따뜻함이 없는 손.
난생처음 만져보는 죽은 이의 손.
그것은 “이제 너와 나는 함께 할 수 없다!”며 그가 내게 전하는 마지막 몸짓이었다.
나는 그제서야, 그의 식은 손을 잡은 후에야, 그의 죽음을 실감하고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청소년기를 막 벗어난 내가 마주한 첫 죽음이었다.
살아서 그는 수 없이 내손을 잡아주었다.
글씨를 배울 때, 넘어졌을 때, 스케이트를 가르쳐줄 때, 자전거를 가르쳐줄 때,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많은 순간에.
하지만 내가 의식적으로 그의 손을 먼저 잡아본 적은 거의 없었다.
이젠 그러고 싶어도 할 수가 없다.
친한 이의 죽음은 늘 후회와 자책을 남기기 마련이지만,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끝없이 밀려오는 안타까움을 떨쳐버리기는 힘들다.
나는 가끔 꿈에서라도 그를 보고 싶다.
그를 만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니까.
하지만 그는 꿈에도 잘 나타나지 않는다.
아마도 저승에서 잘 지내고 있는 모양이다.
다행이다, 다행이다.
이승에서 힘든 마지막을 보냈으니 그곳에서라도 편하다면 참 다행이다.
당신, 잘 계신가요?
그래도 가끔은 꿈에라도 한번 찾아와주세요.
아버지!
***
우연히 TV에서 『Good & Bye』라는 일본 영화를 보았다. 아카데미 외국어영화상을 받은 작품이라고 한다. 한 남자가 고향으로 돌아와 장의사기 되는 이야기였다. 내용이 예상한대로 흘러가서 긴장감은 별로 없었다. 일본의 장례풍습이 우리와는 많이 다르다는 것도 알게 되었고,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재미있게 보았다.
영화를 본 후 내가 마주했던 죽음에 대한 생각을 하다가 영화에 아버지 이야기가 나오기도 해서 위의 글을 쓰게 되었다. 살면서 누구나 죽음과 마주한다. 생명의 피할 수 없는 숙명이라고나 할까. 이런 영화를 볼 때마다 드는 생각은 “죽음”은 늘 산 사람들의 몫이라는 것이다. 죽음 앞에서 온갖 감정을 느끼는 건 산 사람들이지, 죽은 자가 무슨 말을 하겠나. 슬퍼하는 것도, 이겨내야 하는 것도, 정리하는 것도 모두 산 자들의 몫이다.
아무튼 이 영화 내게 오랜만에 글을 쓰게 만들어준 영화니 고마워해야겠다.